어깨선을 넘지 않는 적금발, 타원형 눈썹, 채도 높고 선명한 붉은 눈.
펠레그리나(어깨망토)보다 영대를 걸치고, 만텔로네의 후드까지 덮어쓴 모습을 자주 비췄다. 드물게 만텔로네 없이 돌아다니는 날엔 바스라질 듯 버석거리는 촉감, 결대로 갈라지는 적금발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는 대로 둔다. 칼라와 로리카에 눌려 바깥으로 뻗치듯 휘어진 뒷머리나 시야를 가릴 만큼 길게 길러 양 옆으로 갈라놓으니 옆머리와 구분이 어려운 앞머리까지. 최대위생 최소관리의 가치관이 엿보였다. 주로 착용하는 복장이 복장인 만큼, 후드를 쓰면 금방 가려질 것이라며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엉킨들 손대지 않았다.
둥그렇게 떨어지는 이마는 타원형의 눈썹으로 이어진다. 얇게 쌍꺼풀 진, 어렴풋이 처진 눈매는 채도 높고 선명하리만치 쨍한 붉은 눈과 눈밑에 짙게 깔린 그림자에 눌려 큰 인상을 주지 못한다. 밀색 피부는 호밀처럼 거칠고 수면부족처럼 파리한 낯이지만 사교적으로 말 붙이는 얼굴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건, 신 아래 함께하니 기꺼이 말을 붙여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만텔로네로 숨기듯이 감싼 마른 체형은 펠레그리나를 입어야만 드러난다. 감싸지 않은 맨손은 손마디부터 연결부위까지 모두 거칠고 버석거리며, 손톱은 지독하게 바싹 깎았다. 신 아래 성심을 다하는 만큼, 교복이나 태도는 흐트러지거나 모난데 하나 없다. 장신구를 착용한 적조차 없다. 몸과 옷에 배인 특유의 향마저 없으며, 가끔 묻어나는 낡은 종이 냄새만이 유일하다. 유독 바닥이 얇은 신발을 신고다닌다.
눈치 빠른 / 사교적인 / 헌신하는 / 배타적인
시야가 넓은 건지, 눈치가 빠른 건지 알 수 없는 에리다누스의 처세술은 대공의회에 선발된 이후로 더욱 빛을 발해,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상대가 에리다누스의 욕을 하는지 칭찬을 하는지 알아낼 정도로 발전했다. 수업/훈련 중 생각을 거듭하다 진도를 놓쳤을 때, 옆자리에 앉은 에리다누스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내용을 짚어준 경험은 드물지 않다. 필요한 것이 있어 주변을 돌아보고, 마침 에리다누스가 지나갔다면 옆에 필요한 물건이 놓여있었던 경험 또한. 에리다누스는 눈에 보였고, 할 수 있으니 해준 거라며 말을 아꼈다.
에리다누스가 기억하는 한, 그는 언제나 신실하게 행동했다. 주변인들에게도 에리다누스는 태어난 순간부터 눈 감는 날까지 루치교도일 신학생으로 꼽히며, 누구도 에리다누스가 파문 당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태어난 곳이 다르고 쓰는 말이 달라도 모든 사람은 신께서 가장 공들인 피조물이므로 신을 믿는 자로써 그에 따른 최소한의 존중을 지킨다. 성국인의 대다수가 그렇듯 타 종교인에게 배타적이지만 완벽하게 배제하지 않고, 부정적이지만 미지근한 태도를 유지한다.
하나로 묶은 적금발, 채도 높고 선명한 붉은 눈.
풀어헤치면 허리까지 오는 적금발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어깨에 걸쳐놓았다. 이를 바람에 나부끼는대로 두지 않았고, 결대로 갈라지던 머리타래는 대성전의 앞을 지킬 때면 허브와 기름으로 매만졌다. 착용하는 복장이 복장이고, 문을 지키는 장소가 장소인 만큼 바람결에 머리가 엉키는 일 없게 뒀다.
얇게 쌍꺼풀 진, 어렴풋이 처진 눈매는 시간이 흘러도 한결 같다. 신께서 안배한대로 걸어간 자의 채도 높고 쨍한 붉은 눈은 사사로이 흐려지지 않았다. 언제나 선명하고 맑으며, 투명하고 깨끗하다. 정기적인 휴식과 훈련, 정시교대로 제 색을 되찾은 피부는 고른 혈색이 돌았다. 비록 어린 날의 흔적처럼 눈아래 옅은 그림자가 깔려있으나 누구도 흉으로 여기지 않았다.
기사단 복장과 보호대, 망토로 숨기듯이 감싼 체형은 드러나지 않았다. 징조를 확인하고 의지를 다지고자 손가락 부분을 쳐낸 반장갑 외에는 눈에 띄게 다른 차림새도 없다. 착용한 장신구 한 점 없다. 손톱은 지독하게 바싹 깎았으며, 손마디부터 연결부위는 거칠고 버석거렸다. 몸과 옷에 배인 특유의 향이 없어, 주변의 향이 그대로 묻어나곤 했다.
사교적인 / 헌신 / 맹목 / 안정 추구자 / 회피 / 배척
선행으로 오르내리던 이름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에리다누스 아케르나르”. 시야가 넓은 건지, 눈치가 빠른 건지 알 수 없는 에리다누스의 행동은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배려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조차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눈 닿는 공간을 확인하고, 손 뻗을 거리를 가늠하며 무명의 배려를 건넨다. 상대방이 필요하지 않았어도, 에리다누스는 전하고자 하는 어떤 행동과 말을 취한다. 에리다누스는 이에 대해 눈에 보였고, 할 수 있으니 한 거라며 여전히 말을 아꼈다.
사람들은 에리다누스가 밀라나의 대성전 문을 지키는 동안, 에리다누스를 루치교에 헌신하는 성기사로 떠올렸다. ‘종교와 신’이라는 화젯거리에선 루치교를 제외한 모든 말에 눈을 가리고 흘려들을 만큼 맹목적인 가치관을 은연 중에 떠올린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은 신께서 가장 공들인 귀한 피조물이므로, 신을 믿는 자로써 최소한의 존중을 지키려 했다. 루치교에 헌신하므로 모든 휴식 시간은 기도, 봉사, 필사본 제작으로 이뤄져있음에도 스스로를 놓지 않는다. 최소한으로 아끼며 자기관리한다. 성기사인 만큼 군사 훈련을 꾸준히 받고, 정시 근무를 지킨다.
개인의 의견은 간단하게 털어놓으면서도, 결코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개인사는 특히나 회피하며,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먼저 화두에 올리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에리다누스 개인에 관련된 이야기는 피하고, 상대의 환심을 살 법한 내용을 꺼내는 재주가 더욱 늘어났다. 넓은 시야로 파악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본능적인 회피에서 비롯되었다.
안정된 평정심을 추구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처럼 안정적이기를 바라고, 어떤 상황으로 인한 파문이 일어나길 원치 않는다. 성국인의 대다수가 그렇듯 타 종교에게 배타적이던 생각은 더욱 강화됐다. 온세상 사람들이 루치교를 믿음으로써 사람들이 안정된 화합을 얻기를 바란다. 파문이 일어날 만큼의 갈등이 인다면, 더 큰 믿음과 흐름으로 맞춰가기를 바란다.
직업, 성기사단원 그리고… 대성전의 문지기
기사 서임 1년차를 맞이한 정식 성기사이자 밀라나의 중심 건물, 대성전을 방위하는 성기사단원. 교대 시간에 한 차례도 늦은 적 없는 기사단 동료이며 대성전 방문객과 지나다니는 시민에겐 언제든 친절하게 도와줄 것이란 인상을 준다. 대성전 방문객이 필요로 여길 때 대답하거나, 거수자를 지켜보는 문지기.
필사본 제작용 종이(양피지)에 ½, 코크마 령 멘톤 마을의 가족에게 ¼, 남은 양으로 생활비를 쓰고, 잔액은 수도원에 기부한다.
밀라나 대성전 앞 어느 성기사는 키가 늘었다 줄었다 한다는 뜬소문이 돈다는데….. 대성전 입구를 함께 경비하는 기사단원의 키에 맞춰 위화감 들지 않도록 신발 굽을 붙이며 제 키를 조정하고 있다. 에리다누스와 자주 사담을 나눈 성가대원이 미묘한(작고도 큰) 차이에 비결을 물어보았고, 에리다누스는 신발을 눈짓했다. 최대로 높았던 굽은 기본 높이 포함 20cm.
2차 대공의회로 소집된 지금은 기본 지급된 성기사단의 장화를 조정 없이 신고 있다.
7년간 있었던 일
당신이 1398년 이후 밀라나에 머물렀다면, 1398년 중반부터 에리다누스와 재회했다고 기억할지 모른다. 중앙 교구와 연이 닿아 에리다누스의 행적을 찾았다면, 졸업 후 부제 선임을 유예를 청하며 순례를 떠났다는 내용은 쉽게 접할 수 있다. 1398년 이후 에리다누스는 밀라나 인근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당신이 제국인 또는 왕국인이라면, 카엘루마 성국에 발 디딘 적 없다면 에리다누스와는 2차 대공의회 소집으로 7년 만에 재회하는 셈이다.
개인적인 연락은 졸업 직후 끊어졌으며, 약속한 이가 있다면 약속을 지키고자 전서구 또는 교구를 통해 연락한 것 외에 추가적인 연락은 없었다.
코크마 령, 멘톤 마을
코크마 령은 지도상 아에움 해 인근에 위치하며, 영지 내에서 가장 톨로사와 인접한 마을을 멘톤이라 일컫는다. 마을 입구에서 도보로 열흘밤낮을 꼬박 걸어가면 아에움 해와 인접한다. 사람과 짐마차가 밟아가며 다져놓은 길은 잦은 이변으로 오가는 객이 줄어 황폐해지고 있다. 토착 신앙은 코크마 령의 다른 지역처럼 루치 교 교리에 흡수되었으며, 그 흔적은 멘톤 마을의 옛날 이야기 <유리 빚는 자>에만 남아있다.
멘톤 마을의 옛 이야기. 신의 뜻에 따라 아흔아홉 개의 오색 유리를 만들었고 신께서 그 아름다움을 보시며 약속을 내리는 이야기. 집집마다 변주가 있다.
아케르나르
겐필(아케르나르)은 1396년, 노환으로 사망해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파문 당했으므로 장례식은 없었다.
건축공 제르바시오 아케르나르는 은퇴하지 않았으며 가구상 지타와의 사이는 돈독하며 화목하다.
두 사람은 에리다누스가 보내오는 급여를 모았고, 1399년 9월에 지타의 취향에 맞춰 집을 증축했다.
에리다누스의 공간은 가장 햇볕 좋은 곳으로 남겨두고, 정원에 텃밭을 꾸렸다.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