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
대면한 적 있는, 실재하는 인물의 이름을 부른다.친하게 지내던 어느 장군의 자식, 그 아이가 자칫 우상숭배로 해석될 만한 행동을 했을 때.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그 이름을 불렀을 뿐이다. 그러자 건조한 바람이 불고, 아이의 기도 앞에 있던 것이 무너져 내렸다. 존재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으로 그는 신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대면한 인물에 한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곧이어 탈리브를 입에 올렸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 다른… 자신이 대면한 적 없는 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읊어 확인하긴 했지만.
이미지 커미션:ST 작가(아트머그, 작품번호: 19904)님
사막을 닮은 머리칼은 바람에 흐트러지고, 태양을 닮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빛난다. 너울거리는 옷자락과 짤랑거리는 금붙이에 시선이 팔리면, 그 외양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앳된 얼굴과 괴리가 느껴지는 예스러운 말투에 넋을 놓고 있자면 길고 곧게 뻗은 손이 불쑥 튀어나온다. 곳곳에 굳은살이 박인, 자잘한 흉터들을 사이에 낀, 아마 막 생기기 시작한 모호한 것들도 자리 잡은 손. 그것은 느긋하게 얼굴에 닿는 볕을 가린다.
관조적인, 너그러운, 배금주의
“그렇군. 헌데 자네, 왜 그런 표정인가?”
자신과 관련된 일임에도 타인의 일, 혹은 종이 위 활자에 지나지 않는 양. 그는 대부분의 일을 그렇게 대했다. 감흥 없다는 듯, 고요한 낯과 어조로. 변화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늘 그리 동떨어진 사람마냥 굴었다. ‘그러한가?’ ‘그렇군.’ ‘그럴 수 있지.’ 따위의 말로 주위 사람들의 복장을 터지게 하기 일쑤.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렇듯 관조적인 태도가 나이에 맞지 않아 보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간혹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오호라… 흥미로운 소문이군 그래. 더 자세히 들려주지 않겠는가?” 물으며 잔잔히 웃는 그는, 나이처럼 앳된 얼굴을 했다.
“내버려두게. 부러 한 일도 아닌 듯하니.”
그리고 그 답이 무례하더라도, 혹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그는 아랫사람에게 관대하기 짝이 없었다. 그 자신이 부족을 모르고 자라서 그런 것인지, 자신에게 속한, 자신이 부리는 이들에게 넓디넓은 아량을 보였다. 심지어는 얼굴에 큰 흉을 남긴 시종을 품을 정도였으니, 그는 언뜻 다정한 귀족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시종이 불과 한 달 만에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것을 한 해가 넘어갈 즈음에야 겨우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그것은 다정하다기보단, 관심이 없으니 누가 뭘 해도 좋은 것에 가까웠다. 다정함이 아닌, 무관심에서 비롯된 너그러움이었다. “초봄에 일을 관두었다고? 그래, 그렇구나.”
“방금 내가 들은 게…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 그렇다고 그 너그러움이 그의 진정한 성정인가 하면, 글쎄. 동등하거나 높은 지위인 이들에게는 미약한 화나 짜증이 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참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 무관심한 너그러움은 시혜적인, 값싼 적선에 가까운 태도가 아니겠는가.
“넉넉히 넣어두었네. 혹, 부족한가?”
그런데도 그의 곁에 사람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재상 가문이라는 배경과 수많은 황금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가진 만큼 후했고, 세상에 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되지 않는다면 금이 부족한 것이며, 금만이 최고의 가치다. 물질 외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은 물질, 돈, 그중에서도 황금이니. 그는 철저하게 배금주의로 치장된 삶을 살아왔다. 무관심 속 그나마 관심은 그만의 성의로 표현됐다. 슬픔에 대한 위로는 위로금, 기쁨에 대한 축하는 축하금, 수고에 대한 감사는 수고비 따위로. “돈이 없다면? 글쎄, 장식이라도 내어줄까…”
그 때문에 피상적인 관계는 제법 될지언정, 그 이상의 관계는 없었다. 그 또한 기대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었고. “목숨을 바치는 관계라… 자네는 제법 낭만적이군 그래.” 그러나 돈이 자신보다, 종교보다 우선하는가 하면, “참… 신기한 천칭이구나. 그러고 보니 자네, 헤자즈교도가 아니군.” 당연한 부정.
1. 에르도안
파디샤의 영원한 친구라 함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굳건한 신앙과 신의를 지키는 재상 가문, 그것이 에르도안이다. 그들의 첫 번째 자식이 재상이 되는 것은 태양이 뜨고 지듯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이다. 물론, 그만큼의 황금을 쌓아두었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하게.
이번 대의 에르도안은 하제르의 부친이자 재상 중 하나인 파로크, 다음 대의 에르도안이라고 일컬어지는 직계는 총 넷. 하제르의 위로 둘, 아래로 하나가 있다. 막내, 호람이 철이 들지 않아 사고를 치고 다닌다는 것은 제국 내에서라면 두말 하면 입만 아플 정도로 알려진 이야기.
2. 과거
당연하게도, 마르지 않는 부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아래 안온한 삶이었다. 재물이 넘쳐남은 그의 금장식과 걸핏하면 돈을 쥐여주는 그 태도로 알 수 있었지만, 독실한 신자임은… “어찌 그분을 의심할 수 있겠나? 설마, 자네…” 간혹, 경멸에 가까운 그 태도로 드러났다. 분명 제국의 자유로움과는 다른, 배척의 뜻이었다. 헤자즈교가 아닌 이들을 잘못된, 심지어는 ‘거짓된 종교’의 추종자 따위로 생각했다. 자신에게 큰 상해를 입히는 자는 품을지언정,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의 견고한 신앙은 언제나 고수하는 흰옷에서 얼핏 드러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손윗형제 둘이 그런 것처럼, 궁정학교에 입학한 뒤의 생활은 그에게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말이 통하는 헤자즈교도인 것은 물론, 대부분 귀족 자제뿐이었으니. 신력을 다루게 된 이후에 예비 대원으로 속하게 된 예니센 또한 마찬가지. 물론, 귀족 출신이 아닌 이들도 있었지만… 예니센이지 않은가? 대화를 나눌 상대 정도는 되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썩 괜찮은 환경이었다. 훈련 과정에서 잡게 된 검이 의외의 흥미를 끌어내, 보이게 된 열정과 의지는 부수적인 문제였다.
3. 최근
이변 이후, 밀라나 대공의회에 속한 직후에는 자잘한 갈등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지만, 그로 인해 문제가 일어났거나 휘말린 적은 제법 있었다. 헤자즈교 이외에는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며 대화가 가능함에도 통역관을 통해서만 대화하는 태도며… “뭐라 하던가? 아아… 그래, 그렇구나.” “대답? 글쎄, 생각해 보겠다고 전해주게.”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만 동떨어진 것처럼 벽을 쌓아놓고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구니 호의를 사기엔 어려웠다. 그러나 그간의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혹은 제재가 효과적이었는지 현재는 제법 달라진 모습이다.
4. 현재
직접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은 제재 직후였으나, 진정으로 말이 통한다는 느낌은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정으로 말이 통하기 시작하고, 눈앞에 있는 상대를 제대로 대하기 시작한 것은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발자국 물러난 것이 그라는 인간이기에, 친해졌다고 볼 법한 사이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호명〉
대면한 적 있는, 실재하는 인물의 이름을 부른다.친하게 지내던 어느 장군의 자식, 그 아이가 자칫 우상숭배로 해석될 만한 행동을 했을 때.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그 이름을 불렀을 뿐이다. 그러자 건조한 바람이 불고, 아이의 기도 앞에 있던 것이 무너져 내렸다. 존재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으로 그는 신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대면한 인물에 한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곧이어 탈리브를 입에 올렸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 다른… 자신이 대면한 적 없는 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읊어 확인하긴 했지만.
무감각, 무관심, 무사유
7년, 혹은 26년이라는 시간은 한 인간을 조형하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조형되기란 시간의 길이가 아닌 그 깊이에 달려있어서, 하제르 이븐 바스나 알 에르도안이라는 인간은 고작 이런 형태가 되었을 뿐이다. 시간은 생명과 성장의 매개인 동시에 죽음과 노화의 매개이므로, 어떤 시간은 인간을… … 그는 조금 더 틈이 없어졌고, 단단해졌다. 스물여섯의 그는 열아홉의 그와는 비슷한 것 같기도, 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알아. 나도 보았네. 해서?”
타인의 불행에 보이던 일말의 연민과 시혜적인 적선은 이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타인, 특히나 자신과 관계되지 않았으며 관계되지 않을-아랫사람들에 관하여는 이렇다 할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무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마치 사막의 모래 한 톨을 대하듯, 메마른 태도를 보일 뿐. 그도 사람인 이상 감정이 있고 감상이 있을 테지만, 적어도 그것을 누구에게나 쉬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들의 앞에서도, 이제 나이에 걸맞은 생기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보고는 부관에게 하도록.”
그는 더 이상 타인을 눈에 담지 않는 듯 보였다. 시선은 그저 스칠 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은, 그저 흥미를 위해 머물던 시선은 그 수가 줄었다. 무관심은 너그러움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고, 단지 일관적인 처벌과 보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릇되었다고 말할 이는 많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래야만 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또 그것이 미덕이 되는 자리에 머물게 되었으므로. 그러나, 상관으로서의 그에게 반감을 품을 이유가 없는 것과 인간으로서의 그에게 반감을 품을 이유가 있는 것은 다른 이야기.
“모든 것은 신과, 파디샤의 뜻에 따라.”
본래 생각이 깊어 답을 구하는 자는 아니었다. 지금의 그처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형태는 아닐지라도. 그에게는 명확한 정답과 교본이 있는 것처럼 그 행동에는 망설임이 사라졌다. 옳은 길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그 길을 걷기 위한 방도만을 구하는 태도는 파디샤의 검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물론, 제마아트가 아닌 베이릭, 오롯한 그 검이었다면 더욱 완벽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지금 위치한 자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법이다. 인간의 무사유는 죄악이나 신자와 신하 된 이로서는 미덕이었다.
분명 이전과 같지는 않다. 그러나, 완전히 달라졌다고 하기에는… 이전의 그에게 진정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나? 열아홉의 그와 스물여섯의 그 중, 다른 길에 선 자 있는가? 그는 언제나 이 길 위에 서 있지 않던가. 사막 위의 황금, 사람의 온정 아닌 재물의 가치로.
… 그래도, 2년이라는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에게는 얼핏 그때의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유 없는 관용과 무게 없는 관심으로, 같아질 수는 없겠지만.
1. 에르도안
에르도안은 여전하다. 파디샤의 영원한 친구, 굳건한 신앙과 신의를 지키는 재상 가문. 그들의 첫 번째 자식이 재상이 되는 것은 태양이 뜨고 지듯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이다. 그러니 하제르의 누이, 이라즈가 그 준비를 거의 끝마쳤음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이번 대의 에르도안은 아직 하제르의 부친이자 재상 중 하나인 파로크, 다음 대의 에르도안이라고 일컬어지는 직계는 총 셋. 하제르의 위로 둘이 있다. 아니, 정정한다. 칩거 중인 막내, 호람까지 총 넷이다. 그다음 대의 에르도안이 될 이들에 대하여는 대외적으로 공표된 바는 없다.
2. 일곱 해
대공의회가 와해된 후, 즉시 문제 없이 졸업, 합격한 후에는 에르도안의 손길이 닿았음을 모르는 이 없다. 그는 즉시 메지디의 제마아트에 파견되었고, 다른 곳에 적을 둔 바 없다. 그러나 베이릭에 비해 특수하지 않은 일반적인 업무이므로, 이렇다 할 큰 공은 없으나 맡은 바 일은 충실히 해내었다. 이전까지는 승진에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았으나, 1396년부터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1397년의 해가 떴을 무렵, 그는 메지디 제2제마아트의 지휘관이 되었다. 주로 수행하는 업무는 제1제마아트의 치안 업무-수사 보조 및 베이릭 파견 시 보조 등 부수적인 것으로, 기강이 해이해지기 일쑤지만…
“지금은 훈련 시간, 아닌가?”
그는 자신의 소관인 이들이 늘어지는 모습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3. 변화,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