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은총이 언제나 그대와 함께하기를."
아녜스 쿼플라 세바체티
Agnes Quofla Sevacheti
카엘루마 성국
179cm  , 66kg  ,  19y

✦징조

〈호기- 바람을 후 하고 부는 모습〉

여느 때와 다름 없던 저녁 예배 시간,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뜻으로 촛불을 후, 하고 불어 끔과 동시에 예배당 내의 모든 촛불과 등불이 점멸하였다.
전신

인상착의

저 멀리서 아녜스가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흡사 통나무를 태운 자리에 남은 재의 색깔을 닮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내려온 모습이 눈에 띈다. 늘상 눈을 감은 형상을 취하고 있기에 눈동자 색까지 단번에 파악하기엔 어려움이 있다지만, 궁금하다면 직접 물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테다. 당신이 아녜스를 보는 순간 중 열에 아홉은 웃는 상을 마주할 수 있다.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전형적인 ‘친절해 보이는 사람’의 이미지. 다만 가끔 뼈 있는 말을 하기도 한다는데… 

중앙신학원의 교복을 흐트러짐 없이 착용하였으며, 소탈한 모습에 보이는 장신구라고는 묵주로 사용하는 밋밋한 디자인의 은반지와 은목걸이 하나가 전부. 저녁 예배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시간이라면 작은 촛대를 들고 있는 모습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왼손으로는 항시 지팡이를 짚고 있다. 용도를 묻는다면 지팡이의 사전적 의미와 활용 용례를 궁금해하는 것이냐는 너스레가 들려온다. 관찰력이 좋은 자라면 걸음걸이가 미묘하게 불균형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품행

:: 신실의 성실

달변가 : 신앙심 깊은 : 부지런한


“자!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드립시다.”

주변에는 늘상 사람들이 존재한다. 소위 말해, 사교성이 특출나게 좋았다. 비결이 무엇이냐 묻는 말에 답하기를 ‘신의 안배 아래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먼저 친절을 베푼다면 필히 상대 또한 내게 친절로 답할 것이다! 라 하였다. 이렇게 말했던 시점이 약 10세 남짓 무렵이니…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어린 나이임에도 말씨가 매끄러웠다. 그리고 그 모든 말투, 행동거지의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신에 대한 믿음. 세상만사를 신앙과 엮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전형적인 성국인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테다. 



:: 평범의 규범

검소한 : 깐깐한 : 친절한 원칙주의자 


“땅 파서 돈이 나와요?”

‘그’ 세바체티이자, ‘그’ 사티아스를 외가로 두고 있지만, 사치스러운 모습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건 성국교인의 특성이라 치부하더라도 행동거지, 말씨에서도 오만함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뜯어진 옷을 제 손으로 수선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이따금 다른 이의 사치를 지적하고 적절한 소비를 종용하는 깐깐한 면모 또한 보인다. 신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물자이니 낭비하지 말고 아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녜스의 지론. 척박한 동북부 출신이라는 점이 이런 행동을 만들었으리라 짐작된다.



:: 무정의 다정

무감한 : 두려움 없는 : 그럼에도 다정한


“이것도 결국 신께서 정하신 뜻, 겸허히 받아들이면 돼요.”

타인의, 혹은 뭇 생명체의 죽음에도 좀처럼 슬퍼하는 일이 없었다. ‘죽음 또한 신의 안배, 낙원에 이르는 것을 무서워 할 이유가 있을까요?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한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지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라며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실상은 아직 가까운 이의 죽음, 혹은 상실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다는 관점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아녜스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이러니저러니 하더라도 그에게 다소 무정하고도 칼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무정함 속에도 다정함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타인이 빠르게 알아차려 주기를 바랄 뿐.

이야기

1. 파빌로의 세바체티 Sevacheti de Fabilo 

:: 배경

 콘스탄티노파로부터 북쪽을 향해 마차로 쉬지 않고 사흘을 이동하면 ‘파빌로Fabilo’라 불리는 도시가 나온다. 이변이 극심해진 칼드롬으로부터 동남쪽 부근에 위치해있으며, 영지의 동쪽 끝은 나하르 해와도 닿아있다. 

척박한 토양과 추운 바람이 볼을 에워싸더라도 주의 은총 아래라면 생명은 살아갈 수 있다. 

 이 말을 가장 앞서서 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파빌로를 영지로 둔 유서 깊은 가문. 세바체티다. 본디 소규모 부락의 형태로 삶을 이어가며, 불을 숭상하는 토착 종교 ‘에쉬교’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5세기 성국의 속령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루치교에 흡수되었다. 성국의 신학자들은 루체교의 상징인 별과 에쉬교의 상징인 불 모두 밝게 빛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 흡수를 용이하게 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하곤한다.


:: 풍습

 추운 날씨로 인해 파빌로의 어린아이들은 일찍이 불의 소중함에 대해 배우며 자라난다. 파빌로 지역이 카엘루마에 복속되기 이전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양초에 아이의 이름을 새겨 불을 붙히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는 루치교의 신앙과 만나며 아침기도를 하며 촛불을 켜고 저녁 기도와 함께 끄는 일련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1년의 절반 이상을 추위와 함께하는 파빌로의 사람들에게 불이란 곧 신의 은총이자 마음을 의지할 버팀목이 되기에, 신에 대한 믿음이 특히나 신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현재

 현재 세바체티를 이끌어가는 이는 루도비카 세바체티 공작으로, 부군 체자레 사티아스와의 혼인으로 콘스탄티노파 남부의 비옥한 물자를 북부로 끌어오며, 과거 현명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척박한 기후 탓에 타지역과 비교하여 인구수가 적기도 하고, 순례길을 걷는 신도들을 제외한다면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파빌로지만, 현 공작 루도비카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남부의 사티아스와의 혼인을 성사시키며 조금씩 외부와 교류를 이어 나가려는 징조를 보여왔으나…

 15년 전, 파빌로가 위치한 지역 인근, 칼드롬에서 이변이 발생한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다. 정체 모를 질병이 퍼짐과 동시에 당시 루도비카는 칼드롬과 인접한 일대의 출입을 금하며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파빌로에도 이변은 찾아왔다. 단순한 지진으로부터 시작된 이변은 6년 전, 거대한 눈폭풍의 모습으로 파빌로를 덮쳐왔고, 이날을 기점으로 세바체티의 가세 또한 기울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바체티 공작 휘하의 기사단 ‘바포르 기사단’을 중심으로 피해를 복구하고 견디며 노력해 오고는 있으나… 이변이 극심해짐에 따라 현재 세바체티의 상황은 말 그대로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다. 

 이를 두고 세바체티와 사티아스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것이 6년 전, 체자레 테레즈가 삼남 알렉시오, 쌍둥이 남매 카스파르, 아녜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파로 내려온 일. 세간에서는 사티아스가 세바체티로 향하는 지원을 끊어버릴 것이다, 혼인화합도 끝이다 등의 가십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으나, 여전히 두 가문은 얽혀있으며, 그 사이에서 여러 소문만 분분할 뿐이다.  


:: 가족관계

 루도비카와 체자레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펠리체  차남 칼리스토  삼남 알렉시오  사남 카스파르  그리고 장녀 아녜스. 다섯 중 성력을 발현한 이는 칼리스토와 아녜스로, 칼리스토는 현재 성기사단에 소속되어있다. 현재는 중앙신학원을 졸업한 알렉시오가 2년 전 대공의회를 위해 막 중앙신학원으로 온 아녜스를 붙잡고 신학원 소개를 해주었다는 일화만 보더라도, 가족 구성원간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알려져있다.



2. 사티잔의 사티아스 Satias de Satizan

:: 배경

콜라나 지역에 위치한 백작 가문. 과거 가문에서 운영하던 작은 상단으로부터 시작되어, 카엘루마의 길을 발판 삼아 작금의 대부호로 성장해 왔다. 콜라나 항구가 2항으로 밀려남에 따라 예전만큼의 위상은 아니지 않냐는 오명을 상당히 불명예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부의 물자는 우리 콜라나 지역이 꽉 잡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전형적인 콜라나 사람답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이로 인해 차남 체자레 사티아스와 루도비카 세바체티의 성혼 또한 초반에는 반대했다는 소문이 있다. 이후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는 몰라도 급작스레 성혼을 찬성했는데, 세바체티와 사티아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말들만 가득했었다고. 


:: 현재

본 내용은 사티아스 혹은 세바체티 중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이야기다.

6년 전 파빌로를 강타한 눈 폭풍으로 인해 점차 가세가 기울어져 가는 세바체티를 두고 가문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지금이라도 모든 지원을 끊고 등을 돌려야한다는 의견과, 후일 이변은 극복될 것이며 그때가 다가오면 세바체티는 사티아스의 은혜를 기억할 것이기에 교류를 이어가야한다는 의견이 대립는 중이다. 그리하여 체자레 사티아스와 더불어 알렉시오, 카스파르, 아녜스를 사티아스로 데려오는 것을 조건으로 지원을 이어가는 것으로 협의를 보았다고. 아녜스가 대공의회에 참여함에 따라, 대공의회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기를 바라는 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3.  아녜스 쿼플라 세바체티 

::이름

 정확한 명칭은  ‘아녜스 쿼플라 틸라 세바체티 데 파빌로 에 사티잔(Agnes Quofla Tilla Sevacheti de Fabilo e Satizan)’. 파빌로와 사티잔의 네 번째 불꽃, 아녜스 틸라 세바체티라는 뜻을 담고 있다. 편의상 문서 및 대외적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아녜스 쿼플라 세바체티’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성국 귀족의 작명법을 따르고 있으나 중간에 ‘몇 번째 불꽃’이란 의미를 담아 나이 순서대로 부여하는 별칭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쿼플라’의 경우는 네 번째 불꽃이란 이름을 담고 있으며, 나이순으로 운플라, 듀플라, 트레플라, 쿼플라 등의 순서대로 붙여진다. 아녜스의 경우 쌍둥이 형제 카스파르와 함께 쿼플라를 부여받았다.

 흔히 아녜스, 세바체티 등으로 지칭된다.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친절하긴 하나… 네 번째 불꽃, 쿼플라라고 불러주는 이들에게 더 친절하다는 뜬소문 또한 존재한다.  


:: 생애

 파빌로가 워낙 인구수가 적기도 하고, 성국의 각 지역과 교류가 활발한 지역도 아니다 보니, 동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모습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세바체티에 넷째가 있었냐, 라는 반응도 존재했었다고. 6년 전, 파빌로의 눈 폭풍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콜라나의 사티잔에서 지내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신학교 휴식기에는 파빌로와 사티잔 모두를 방문한다. 


:: 호불호 

호,를 묻는다면 되려 묻는다, 신앙과 관련된 호를 말해줄까요, 그 외의 호를 말해줄까요? 전자를 선택한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아녜스의 기나긴 신앙 철학을 들을 수 있을 테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산딸기 잼을 넣은 빵, 포도주스, 따듯한 불 등을 나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호의 경우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즉답이 나온다. 무례한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예의없는 사람, 사치스러운 사람. 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을 마주하더라도 불호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 언어 

현대 카엘룸어를 무리없이 유창하게 구사하지만, 사티아스의 영향으로 이따금씩 고대 카엘룸어가 튀어나온다. 이때 상대가 이해하는 것을 어려워할 경우,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고 짧은 사과 후, 현대 카엘룸어를 다시금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카엘룸 뿐 만 아니라 헤자즈어, 신두어 또한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4. 아카데미 생활

:: 동부신학교

 7살 끝 무렵에 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 신학교에 입학하리란 모두의 예상을 깨트리고, 아녜스는 한 해가 더 지난 9세 무렵 동부신학교에 입학했다. 아직 어린 딸을 품에서 떠나보내기 아쉽다며 공작내외가 입학일을 1년만 더 미루어달라 부탁한 일화가 있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기에, 느지막한 첫 입학부터 이목이 집중되었다. 

 신실한 이들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입학한 이래로 현재에 다다르기까지, 동부신학교에서 일과시간 중에 이루어지는 모든 예배에 참석한 사람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전반적인 신학교의 교육과정을 충실히 따라오는 성실한 학생이지만, 특히나 두각을 드러내는 분야는 ‘언어’와 ‘신학’. 그중에서도 6학년 무렵,  ‘세상 만물에 깃든 신의 안배와 은총’을 주제로 연말 미사에서 발표한 연설문이 유명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 한 방울,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땅의 흙 한 줌, 하물며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실오라기 하나까지도, 신의 사랑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신의 은혜는 이 세상을 감싸안고도 남을 만큼 광활하나, 동시에 작은 티끌 하나에도 존재하니, 우리는 작은 것에도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 (중략) …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을 사랑해야합니다. 과거로부터 배우고, 현재를 사랑하며, 미래를 준비합시다. 그리하면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후략).   

연말 미사 연설문 中 일부 발췌



5. 밀라나 대공의회

::선발

 동부신학교 재학 중, 평소 보여온 높은 학업성적 및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대공의회의 일원으로서 선발되었다. 영광스러운 일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대공의회를 위해 떠나는 것이 확정된 시기부터 중앙신학교에 머무르는 지금까지, 아녜스의 오라비들이 종종 그를 찾아와 짧은 담화를 나누고 갔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드물다. 언뜻 들리기로는, 아녜스를 향한 일방적인 걱정을 쏟아내고 갔다는데… 아녜스에게 무슨 대화를 했냐 묻더라도 ‘시시콜콜한 말인지라 듣기에 영양가가 없다.’라는 반응만 비출 뿐이었으며, 가족과 무언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휴식기에는 항상 자리를 비우곤 했다. 


::생활

 빠짐없이 참석하는 예배, 깊디깊은 신앙심, 전반적으로 높은 성적까지, 동부신학교에서 그러했듯이, 중앙신학교에서의 생활도 우수하다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알-파티하와 신두로부터 온 이들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는데,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하에 지나가는 이들을 붙잡고 각국의 언어를 알려달라 청했다는 일화도 꽤나 유명하다. 누군가는 공용어로 성국어를 사용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고 말하기도 했으나… 상대의 문화를 알게 된다면 주님의 깊은 뜻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야망 아닌 야망이 기저에 깔려있었다고.

"다만 바라건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
아녜스 쿼플라 세바체티
Agnes Quofla Sevacheti
카엘루마 성국  ✶ 181cm  ✶ 70kg  ✶  26y
Teresa
제가 테레사님을 지지한다고 해서 놀라셨어요? 이해해요. 당장 세바체티 영지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사티아스가 누구와 목소리를 같이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제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테레사님이 아닌 라데군다님이겠지요. 하지만요, 다시 생각해볼까요? 세바체티 영지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요. 우리 영지는 칼드롬과 인접해 있어요. 파빌로의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이변이 나타날까 두려워하며 살아가요. 알아요, 이 또한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시련이라면, 주님을 향한 믿음과 함께 이 시련을 이겨내는 것 또한 우리의 본분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꼭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하자면, 네. 저는 절박해요. 우리 세바체티의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어떤 일이라도 할 거라는 뜻이랍니다!

전신

징조

〈호기- 바람을 후 하고 부는 모습〉

여느 때와 다름 없던 저녁 예배 시간,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뜻으로 촛불을 후, 하고 불어 끔과 동시에 예배당 내의 모든 촛불과 등불이 점멸하였다.

인상착의

흡사 통나무를 태운 자리에 남은 재의 색깔을 닮은 머리카락은 어느덧 길게 자라 허리 아래로 굽이친다. 감았던 눈을 뜨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파빌로 이변 이후였던가. 본래라면 새카만 눈동자와 함께 붉은 동공이 보였겠으나, 어째 눈에 보이는 검은색은 하나에 불과하다. 바로 옆으로 시선을 옮긴다면 짙은 화상 흉과 마찬가지로 잿빛으로 변한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다. 과거와 비교하면 확실히 웃는 모습이 줄긴 줄었으나, 완전히 웃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 처럼 활짝 웃기보다는, 그저 입매만 끌어올려 웃는다. 

 성기사단 복장은 언제나 단정히 착용하고 다닌다. 전투 시 찢어지거나 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수선하는 것인지, 끄트머리에 바느질 자국이 남아 있기도 하다. 성기사단 입단을 하며 검술도 배웠으나, 치료와 지원을 주로 하는 성행 특성 상, 후방에 배치되는 경우가 잦아 검술을 사용할 일은 드물었다. 하여 창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공할 만한 위력이 나오지는 않지만, 과거 사용하던 지팡이의 역할을 대신할 겸 기다란 촛대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사시에는 촛대를 휘둘러 타격하거나 끝으로 찌르는 것도 가능하다고. 허리춤에 체인을 걸어 휴대 도구나 필요한 물품을 종종 걸곤 하는데, 체인 끄트머리에 답지 않게 반짝이는 물색 보석이 흔들리곤 한다. 출처를 묻는다면 과거 친구가 준 것이라 답한다.

품행

:: 상실의 신실

신앙심 깊은 : 근면한 : 차분한

 

“기도드릴까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시는 신을 위해.”

 

과거와 비교해 마냥 밝고, 통통 튀던 모습은 더러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주변에는 늘상 사람들이 존재한다. 신께서 만드신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니 친절하게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는 것이 그의 지론. 허나 그렇기에 접경지 분쟁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입을 다무는 모습 또한 보여왔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과는 다르게 누군가를 미워하고, 척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결국 ‘이 또한 신의 뜻’이라는 좋은 변명을 방패 삼아 살아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행하는 것, 입에 담는 것. 모든 말투, 행동거지에 기반이 되는 것은 역시나 신에 대한 믿음이다. 전형적인 성국인이라는 표현이 딱 적당하겠다. 



:: 평범의 규범

검소한 : 깐깐한 : 친절한 원칙주의자 

 

“땅을 파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그는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여전히 검소하고, 행동은 공손하기 그지없다. 뜯어진 옷을 제 손으로 수선하는법 뿐만 아니라, 이제는 구름의 모양으로 날씨를 예측하고, 오래 신은 구두 밑창을 어떻게 갈면 좋을지의 방법도 알게 되었다. 성국 교인이라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치와는 동떨어진 삶을 산다. 여유 자금이 생기는 족족 파빌로와 세바체티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없다. 



:: 무정의 다정

다정한 : 두려움 없는?  : 박애

 

“그대 평안히 쉬어요.”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익숙하다. 눈을 감기고, 성호를 긋고, 축복의 말을 읊고, 뒤이어 짧은 기도의 말을 왼다. 수도 없이 그런 행동들을 반복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녜스 본인만 알고 있을 테다.  

수많은 부상자를 치료하고, 수많은 사망자의 눈을 감겼다. 그 과정에서 정말 죽음 또한 신의 안배라 외치는 것이 가능했을까? 적어도 이제는 그런 문장을 입에 담는 일은 없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성기사단 입단 초기에는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것 같기도 한데…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눈물은 사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를 무정하다고 칭하지는 말자. 아무리 고난이 이어지고, 그는 여전히 세상 만물을 사랑한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것, 대화할 수 있는 것, 오늘 하루도 살아낸 것. 이 모든 것이 행복으로 다가왔으니…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한다. 

이야기

1. 파빌로의 세바체티 Sevacheti de Fabilo 


:: 배경


콘스탄티노파로부터 북쪽을 향해 마차로 쉬지 않고 사흘을 이동하면 ‘파빌로Fabilo’라 불리는 도시가 나온다. 이변이 극심해진 칼드롬으로부터 동남쪽 부근에 위치해있으며, 영지의 서쪽은 카렐리아와, 동쪽 끝은 나하르 해와 맞닿아있다. 


 척박한 토양과 추운 바람이 볼을 에워싸더라도 주의 은총 아래라면 생명은 살아갈 수 있다.


 이 말을 가장 앞서서 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파빌로를 영지로 둔 유서 깊은 가문. 세바체티다. 


:: 과거


 세바체티를 이끌어가는 이는 루도비카 세바체티 공작으로, 부군 체자레 사티아스와의 혼인을 통해 콘스탄티노파 남부의 비옥한 물자를 북부로 끌어오며 현명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1387년, 눈 폭풍의 형태로 발생한 이변으로 인하여 고난을 겪었다. 세바체티 공작 휘하의 ‘바포르 기사단’을 중심으로 피해를 복구해 오며 견디고 있었으나, 많은 이들이 말하기를 세바체티의 현 상황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다 하였다. 


본디 물자가 넉넉한 지역이 아니었기에 외부의 지원 및 자체적인 구호 활동을 통해 차츰차츰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갔으나… 


:: 현재


성국인이라면, 혹은 소문에 밝은 제국, 왕국인이라면… 1394년 초에 발생한 ‘파빌로 이변’을 모를 수 없다. 그 이변을 목격한 이들이 말하기를. 


캄캄한 밤. 파빌로 곳곳에서 연기가 일어 다들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한 곳에서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외쳤다. ‘신이시여, 저희를 벌하시는 것입니까?’, ‘신께서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다!!’  


 


북부의 건조한 기후가 악재가 되어 불길은 점차 파빌로 전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했고, 곧 세바체티 성까지 불길에 휩싸이는 대화재로 이어졌다. 사망자, 부상자의 수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큰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펠리체 세바체티의 복부 부상 및, 아녜스 세바체티의 안면부의 화상, 왼눈의 실명 등 참극을 낳았다. 


생존자 중 일부는 파빌로를 떠나 성국 각지로 향했으며, 일부는 여전히 파빌로에 남아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허나 많은 이들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속삭이곤 한다. 세바체티는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고.   




2. 사티잔의 사티아스 Satias de Satizan


:: 배경


콜라나 지역에 위치한 백작 가문. 과거 가문에서 운영하던 작은 상단으로부터 시작되어, 카엘루마의 길을 발판 삼아 작금의 대부호로 성장해 왔다. 


:: 현재


1394년 ‘파빌로 이변’ 이후, 이제는 정말로 사티아스가 세바체티와 연을 끊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허나 어쩐 연유인지 사티아스는 그 모든 소문에도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은 바가 없으며, 되려 세바체티로 구호 물자를 보내고 세바체티의 난민 일부를 거둬들이는 등. 우호적인 행보를 보여오고 있기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반응들이 대다수다.


하단의 내용은 사티아스 혹은 세바체티 중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이야기다.


파빌로 이변 직후, 사티아스는 실제로 세바체티와 연을 끊어내고자 결정한 바 있다. 루도비카 세바체티와 체자레 사티아스, 그리고 사티아스의 원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리 정하고자 했으나… 회의장에 아녜스를 비롯한 형제들이 난입하며 상황이 변화했다. 


 


 원로들을 향해 무릎 꿇은 아녜스는 부디 파빌로를, 세바체티를 버리지 말라 호소했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변을 해결하겠다고, 감히 그렇게 말했다.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사티아스의 물음에 그들은 무엇이든 하겠다 답했고, 3년의 유예기간을 얻어낸다. 그 대가는 펠리체, 알렉시오, 그리고 아녜스가 사티아스가 지정하는 이들과 혼맹을 맺으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397년, 이변이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약속대로 펠리체는 콘스탄티노파 인근의 비셀레 백작가와 성혼한다. 여전히 잠잠해지지 않는 이변,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1399년, 알렉시오 또한 콜라나 남부의 트란테인 백작가와 성혼 약속을 한 바 있다. 아녜스 또한 밀라나 남부의 켈로테 공작가와 같은 절차를 밟았으나, 콘스탄티노파 대공의회로 인하여 정확한 논의는 그 이후로 미뤄진 상태다.




3.  아녜스 쿼플라 세바체티 Agnes Quofla Sevacheti


:: 이름


  정확한 명칭은  ‘아녜스 쿼플라 틸라 세바체티 데 파빌로 에 사티잔(Agnes Quofla Tilla Sevacheti de Fabilo e Satizan)’. 파빌로와 사티잔의 네 번째 불꽃, 아녜스 틸라 세바체티라는 뜻을 담고 있다. 편의상 문서 및 대외적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아녜스 쿼플라 세바체티’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아녜스, 세바체티 등으로 지칭되며, 과거와 다르게 자신을 쿼플라라고 지칭하는 이가 있으면 기뻐하기보다는 조용히 아녜스. 라고 정정해 주는 모습을 보인다.




:: 파빌로 이변


 대공의회가 와해된 이후, 아녜스 또한 동부 신학교로 돌아가 졸업 준비를 하고 자연스레 부제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부제시험 1주일 전, 파빌로에 이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빌로로 향한 아녜스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처참했다. 검게 타버린 대지, 하늘에서 흩날리는 이것이 눈인지, 잿가루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혼란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세바체티 성을 목격한 순간. 그 안에 첫째 형제, 펠리체 세바체티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른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바체티 성으로 진입. 잔해에 가로막혀 나오지 못하던 펠리체와 조우한 아녜스는 재빨리 그를 구출하고자 하였으나… 화염으로 인해 성이 무너지며 미처 피하지 못한 잔해에 안면부에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더불어 성을 가득 채운 매캐한 연기 탓에 호흡하기조차 어려웠으니, 간단히 바람을 불어내는 징조를 갖고 있었음에도 성행을 제대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이대로는 펠리체와 자신 모두 위험할 것이라 판단, 있는 힘을 다해 숨을 불어 전송 마법을 실행. 다만 평소 능숙히 사용하던 부류의 마법이 아니었으며, 마법의 난이도 자체가 높았기에 전송된 펠리체는 복부에 큰 상흔을 입은 채로 세바체티 성문 앞으로 전송되었다. 펠리체를 전송한 뒤, 자신을 대상으로 전송마법을 한 차례 더 시도, 추가적인 부상 없이 전송되었으나, 앞과 동일한 이유로 인해 도착지는 세바체티 성문 앞이 아닌, 그와 한참 떨어진 파빌로 외곽지역이었다. 


 세바체티 성의 화재가 진압된 후, 바포르 기사단을 비롯한 여러 인원들이 성의 잔해를 수색했으나 아녜스의 모습은 보일 리 없었고. 루도비카는 뒤늦게 파빌로 전역으로 수색을 확대했다. 그런 아녜스가 구조된 것은 펠리체가 전송된 시점으로부터 약 5일 후. 잿더미로 변해버린 파빌로 외곽 숲에서 발견되었다. 


 즉시 기본적인 치료 후, 콘스탄티노파에 위치한 의료시설로 옮겨졌으며, 생명에 지장은 없으나 안면부와 왼 눈의 부상은 회복이 불가하다는 답을 받게되었다. 


:: 호불호


 요즘 같은 시대에 누군가의 호불호를 물을 여유가 남아있는지 모르겠으나, 누군가가 호를 묻는다면 신,이라고 답한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잡담하는 중에도 어딘가에선 이변이 발생하고 있기에, 아녜스의 기나긴 신앙 철학을 들을 수는 없다. 산딸기 잼을 넣은 빵, 포도 주스, 따듯한 불. 불. 불… … 이제는 입에 올리는 일이 없다. 


 불호의 경우, 글쎄요… 라는 애매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여전히 무례하고, 거짓말하고, 예의 없고, 사치스러운 사람을 싫어하는 것 같긴 한데… 개인의 호불호를 말하기엔 여유 없는 시대인지라. 그저 ‘가서 일이나 할까요-?’라고 한다고. 그 외 특별히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불을 보게 된다면 흠칫, 몸을 굳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약한 행동이기에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나 알아차리겠지만, 작은 촛불에도 오래 시선을 두는 법이 없다. 




4. 성기사단 생활


:: 입단


파빌로 이변과 부상 이후, 돌연 성기사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평소 기사 훈련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기에 반대를 마주했지만, 강경하게 의사를 밝힌바. 결국 충분한 회복 이후를 조건으로 1394년 말, 재편된 제 2성기사단에 입단했다. 


:: 행적


[1394년~1395년]


초반에는 당연하게도, 체력적인 한계로 인해 고난을 겪었다. 검보다는 펜을 쥐며 살아왔고, 달리기보다는 성서를 읽으며 살아온 아녜스에게 성기사단 생활은 녹록지 않았으나,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밤잠을 줄여가며 훈련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1년, 2년, 연차가 쌓일 수록 그 생활에 익숙해졌고, 물렁거리던 손엔 굳은살이 박여갔다.


[1396년]


시간이 지나며, 이변으로 인한 피해가 급증함에 따라 성기사단 내부에서도 회복 및 지원 인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평소 지원 및 회복과 관련된 성행을 특기처럼 써왔기에, 제4성기사단으로 이전되었으며, 성국 전역을 돌며 부상자를 치료하고 전투를 지원했다. 


[1397년]


평소 깊은 신앙심을 보여오고, 빠른 상황 판단력으로 참여한 전투에서 부상을 최소화하는 등, 그 공훈을 인정받아 1397년 말, 비교적 이른 나이로 부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398년]


콜라나 남부에서 땅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화염이 넘실거리는 이변 발생하여 제4성기사단을 비롯한 타 성기사단이 파견되었다. 초기에 불길을 진압하고 민간인의 대피를 주도적으로 진행하여 피해를 최소화 하고, 사후 민간인들의 거취 및 부상회복 또한 명민하게 진행하였다. 여기에 더불어 기사단 전원 생존과 함께 귀환하였다는 점에서 공적을 인정받은 바 있다.


[1399년]


접전지 전투 지원 중, 제4성기사단장 ‘세라피나 살로메’가 사망하며 기사단장 자리가 공석이 됨에 따라, 그 자리에 누구를 배치할지를 두고 의논이 이어진다. 아녜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어린 나이라는 의견이 있어 배치가 지연되었다. 허나 평소 인망이 두텁고, 간단한 징조로 안정적이게 성행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결국 1399년 12월, 제4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파 대공의회에 참여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1400년]


작별을 고하고 7년이 지난 시간.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찾아. 신의 뜻에 따른 길을 걷기 위해 대공의회에 다시금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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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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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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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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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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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
0 / 10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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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5 / 10
근면
10 / 10
민첩
4 / 10
재주
5 / 10
인내
4 / 10
설계
0 / 10
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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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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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
32 / 999
도덕
145 / 999
0 / 999

INVENTORY


STORY

  • 클레멘 힐데브란트

    [다가온 현재]

    " 아무래도 벨엄의 기후는 더운 편이니까ㅇ... 아, 아...닌가요? "

    대공의회가 해산되고, 함께 동부 신학교로 돌아갔기에 둘의 연은 계속되었다.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기에 파빌로 이변에 대한 소식도 이르게 전달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파까지 병문안을 와주기도 하였다고. 이변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미래를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에, 클레멘의 도움으로 일부 주민들을 벨엄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후로도 주고받은 편지 속에 그 주민들에 대한 염려, 근황 등이 포함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을 터.

    본디 상대를 바라볼 때, 세속적인 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자신이 보는 상대의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아녜스였기에, 그간 이따금씩 들려오던 클레멘을 향한 소문들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고. 그에게 클레멘은 여전히 제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신실하며, 믿을 수 있는 친우이므로.



    [흘러간 과거]

    "클레멘은 항상 저와 예배에 참석했어요. 즉,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동부신학교 시절부터 현재에 다다르기까지, 아녜스에게 '신실한 학생이 누가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는 어김없이 클레멘을 필두로 한 몇 이름을 나열하곤 한다. 단 한 번도 예배를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녜스에게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자, 동시에 자부심을 가지는 일이었으니... 자신과 같이 모든 예배에 참석한 클레멘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바체티와 사티아스, 그리고 힐데브란트. 각자의 가문이 가진 여러 풍문들이 있겠으나 오롯이 신실한 신자로서 교류하니, 둘의 관계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그 풍문들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리라.
  • 유르카 카르얄라이넨

    [다가온 현재]

    "그대에겐 언제나, 고마울 따름입니다. ...해서, 작금의 상황에는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파빌로 이변 이후, 콘스탄티노파의 병실로 유르카가 병문안을 와주었다. 회복을 도와주는 모습을 본 아녜스의 형제들에게 눈과 흉터 치료에 대한 내용으로 한동안 시달린 사실은 유명한 일화. 헌데 평소처럼 쿼플라, 라고 부른 유르카에게 그렇게 부르지 말라며 소리를 친 일은... 그다지 알려진 일은 아닐 테다. 속 깊은 상대였기에, 그 이후로는 아녜스라 불려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파빌로와 인접한 카렐리아에서 주민을 일부 받아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다시금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미안함을 금치못했다. 이후 간간히 편지로 안부를 주고 받다가, 몇 이변지에서 조우한다. 이후 유르카는 주교 서임으로, 아녜스 또한 부기사단장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으니... 느리더라도 서신이 오갔으나, 1399년, 유르카로부터 연락이 끊기며 막연히 걱정을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대공의회에서 다시금 조우한다. 어째 서로 다른 빛의 망토와 함께.


    [흘러간 과거]

    "유르카에게는 감사한 마음만 가득할 따름입니다. 언젠가 보은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어요."

    성국의 지도를 펼쳐본다면, 칼드롬 근처에 위치한 파빌로와 카렐리아의 영지의 한 면이 인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과거 부모님세대부터 교류가 이어진 것은 당연한 사실. 칼드롬에 이변이 발생한 이후로는 그를 주시하며 보다 활발히 교류를 해왔다는데... 또래친구가 귀한 동북부이기에 공작 내외는 이따금씩 아녜스를 데리고 카렐리아로 향하곤 했다. 호불호 및 성향이 비슷한 둘 이었기에 쉬이 친해질 수 있었으며, 6년 전 이변이 파빌로를 덮쳤을 때 카르얄라이넨이 세바체티를 도우며 은덕을 입었다고. 각자 동부, 중앙 신학원으로 진학한 이후에도 근근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대공의회에 함께 참가한 것을 알게 된 둘이 반가움을 표한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다.
  • 에리다누스 아케르나르

    [다가온 현재]

    "그러니까, 웃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대와 제가 성기사가 된 이 사실이요. "

    사실, 7년 여의 시간 동안, 에리다누스와 얼굴을 마주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허나... 간간히 이야기는 들려왔지. 형제들의 입에서 들려오던 낯익은 인상착의. 언젠가의 어린 날의 약속을 지키러, 검게 타버린 땅을 밟았다는 그의 소식에 지었던 것은 웃음일까, 쓴웃음일까.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가고, 1399년. 제4기사단장 서임을 위해 오랜만에 밀라나 대성전에 방문한 아녜스는 그 앞을 지키는 에리다누스와 재회하게 된다. 과거 자신이 그러했듯... 사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상대이기에, 기사 서임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꽤나 놀람을 표하기도 했다는데... 연무장 한 바퀴에 숨을 헉헉거리던 과거는 농담거리가 된 지 오래라고.
  • 멜키오레 곤차가

    [흘러간 과거]

    "멜키오레가 제 친구는 맞으나... 그가 재수 없는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에는 별달리 첨가할 말이 없습니다."

    세바체티와 곤차가. 성국의 귀족 가문이라면 으레 이루어지는 소소한 교류를 시작으로 둘은 어린 시절부터 근근히 접점을 만들어왔다. 언어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 덕분에 함께 여러 언어를 수학하곤 했다는데... 작금에 와서는 '사실 멜키오레는 언어 공부 따위는 진즉에 마쳤기에 굳이 필요가 없고, 그냥 놀이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녜스의 기준엔 멜키오레의 행실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던 지라... 결국 오늘도 잔소리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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